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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 주인공 김상덕

 

국내 최고의 지관이며 본 작품의 주인공 중 한명입니다. 

이름은 독립운동가 김상덕에서 따온 것입니다.
어지간한 기업 회장도 굽신댈 만큼 높은 입지와 평판을 가진 지관으로, 화림이 가져온 의로를 접수한 뒤 묫자리를 살펴보고는 불길함을 느껴 거절하려고 하지만 결국은 맡기로 결정합니다. 초반에는 이화림과 의견 차이로 부딪혔지만 결국 힘을 합쳐 최종 보스를 무찌르게 됩니다. 마지막에 날렸던 치명타는 4명 중 오직 상덕만이 알고 있던 오행에 대한 지식과 발상의 전환 덕분이었습니다. 이후 오니에게 입은 중상으로 사경을 헤매면서 '흙으로 돌아갈 뿐'이라며 담담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다가 '아, 딸 결혼식'이라는 실로 삶의 냄새가 나는 한 마디 독백을 남기고 생명줄을 붙들고 살아남아 끝내 결혼식에까지 무사히 참석합니다.

생색도 잘 내고 금전에 얽매이는 모습도 보여주지만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지관으로서의 직업의식이 분명하며, 수상한 건을 수행하면서도 일행에게도 '정중히 모시자'고 하는 모습, 파묘가 끝나자 잘 썼다며 100원 동전을 묫자리로 던지는 모습 등 가장 진중하게 나서는 인물입니다. 또한 1장에서 김 회장네 가족들의 악몽의 발단이 된 아이를 살갑게 달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곧 할아버지가 되기 때문이지 갓난아이인 아들을 살려 달라는 박지용의 부탁도 끝내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영화 후반부에 맞닥뜨린 진실에서 동료들을 설득할 때에도 단순히 민족주의적인 적대감이 아니라 '언젠가 우리도 묻히게 될 곳이자 우리 후손들이 살아야 할 땅을 지켜야 한다'는 미래지향적인 면모도 보이는 바람직한 어른상입니다. 소유 차량의 차 번호가 '49파 0815'로 49재, 파묘, 광복절을 연상하게 됩니다.

 


독립운동가 김상덕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전 정치인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서 친일파 청산에 처음으로 앞장섰습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습니다. 
김상덕은 1892년 12월10일 경상도 고령현 내곡면 저정도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김성옥과 어머니 김경익 사이에서 5째로 태어났습니다. 5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고향 저전동 근처 내상리 소재 내산서당에 들어가 홍와 이두훈의 문하에서 19살때까지 한학을 수학했습니다. 21세가 되던 1912년 4월 뒤늦게 고령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중퇴하고 상경해 경신학교에 입학합니다. 1917년 3월 경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 일본에 유학,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19년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 등과 함께 조선독립청년단 대표로 2.8독립 선언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 해 3월21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금고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2심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 1920년 3월 중화민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동방혁명대표자회의에 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고, 1923년 2월에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로서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같은 해 6월 국민대표회의의 폐회 선언이 이뤄지면서 결렬되자, 1924년 봄 길림성 길장도 반석현으로 가 김동삼 등과 재만농민동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서 기관지 '농민보'를 간행하였습니다. 이후 정의부에 참가했으나, 1928년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통합회의가 결렬되자, 김동삼을 따라 혁신의회에 참여해 행위원을 맡았습니다. 
1932년 한국독립당 소속 군대인 한국독립군 참모를 거쳐, 1933년 한국독립당 중앙대회의 결정에 따라 신숙과 함께 난징에 파견되어 한중연합군을 조직하기 위해 중국 국민정부와 교섭하기도 했습니다. 1934년 3월에는 난징에서 신한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당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서기부원 및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자 같은 해 11월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에 선임되었으며, 1943년 4월 임시정부에서 구성한 선전위원회위원 15인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1944년 4월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에 취임하였으며, 그 해 6월부터는 학무부가 문화부로 개편되면서 문화부 차장에 취임하였습니다. 1945년 3월에는 문화부장에 취임하여 활동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습니다. 그 해 11월 23일 제1차 임시정부귀국단으로 귀국하였고 이후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47년부터 1948년까지는 모교인 경신중학교 교장에 취임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56년 4월28일 별세하였습니다. 사후 재북인사릉에 안치되었습니다.

 

영화 속 철혈단에대해

1) 철혈단은 독립군 단체인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감독의 언급에 따르면 영화 제작 이후 우연히 이름이 같은 실존 독립단체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 했고, 작중 행적을 봐도 독립 활동에 연관한 정보가 일체 나오지 않아 단순한 지관 단체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철혈단의 사진을 봐도 독립이라는 글이 적힌 뭔가가 있다든지, 하다 못해 태극기를 들고 있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철혈단이 독립군 단체라면 무라야마 준지 입장에서는 오니가 묻힌 땅에 박근현의 묘를 첩장하기 보다는 차라리 조선총독부에 신고해서 그들의 활동을 탄압하는 게 더 쉬운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무라야마가 자신이 몰래 박은 오니의 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철혈단을 잡아 달라고 일본 제국 경찰에 요청을 했다 한들 독립군 잡기 바쁜 제국 경찰이 일본 전통 신앙도 아닌 조선 풍수같은 미신을 믿고 토지측량용 쇠말뚝이나 뽑으러 다니는 철혈단을 잡기 위해 이런 산간벽지에까지 경력을 파견할 이유가 없습니다. 철혈단이 정말 독립단체였다면 무라야마가 나서기 전에 이미 제국 경찰이 체포하려 다녔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의적으로 공권력을 동원할 수 없었던 무라야마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낼 정도로 거물인 친일파 박근현의 묘를 오니가 묻힌 자리 위에 첩장하는 방법으로써 이 일대를 쉽게 출입하지 못하게 해 철혈단의 활동을 방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보국사 보살이 증언한 대로 어느 높으신 분이 묻혀서 경비가 삼엄해져 접근하기도 어려웠다고 하며, 어느 날 갑자기 도굴꾼들이 다 잡혀가거나 북으로 도망갔다고 하는데 이는 도굴 혐의로 철혈단원들을 체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원들이 실제 도굴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풀려난 이후 이들이 후에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군에 투신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2) 철혈단은 해방 이후 활동했는가

가능성이 낮습니다. 무라야마가 이들을 방해하기 위해 박근현을 첩장했다면 이래저래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해방 이후 일본인과 친일파들 대다수가 대한민국 땅을 떠나거나 조용히 살았습니다. 무라야마가 해방 이후에 기순애라는 법명으로 정체를 숨기고 한국 땅에 살았는지에 대해선 정보가 없지만, 근처 절의 기순애라는 유명한 스님에게서 묫자리를 받았다는 말은 후에 거짓으로 드러났고 화림의 스승이 일본에서 무라야마를 만났었다는 얘기를 통해 그가 해방 이후 조선을 떠났을 가능성을 높혀 줍니다. 또한 유명한 친일파 박근현이 해방 이후에도 어떠한 사적 응징이나 형사 처벌을 받지 않고, 당시 많은 친일파들이 그러했듯이 이승만 정권 유지에 적극 동참하여 권력을 유지하던 중에 사망한 것인지는 영화 상에서 제공한 정보가 없어서 모르는 일입니다.

만약 박근현이 해방 이후 사망했다고 한다면 손자 박지용에 빙의했을 때, 일제 찬양을 하는 연설이 아닌 일제에게 승리한 미군에 대한 찬양이나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연설, 또는 반공 연설 등을 했을 가능성이 더욱 높습니다. 이승만 정권 하에 살아남은 친일파들의 모습을 봐도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 더 이상 일본에게 충성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박근현이 해방 후에 묻혔다는 가정은 무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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